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저서인 정치학에서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규정하였을 만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폴리스는 생활의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그리스 역사에서 빼놓고 말할 수 없는 폴리스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고, 폴리스의 기원과 성립과 폴리스 체제의 확산과정, 그리스 민주정치에서 폴리스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폴리스의 관계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곧 폴리스의 역사이며 그리스의 문화는 곧 폴리스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폴리스의 성립이 갖는 더 큰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전체 서양역사와 전체 서양문화의 참다운 시작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대체로 참다운 서양역사와 참다운 서양문화는 그리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빛이 오리엔트로부터 왔다는 사실, 특히 서양문화의 중요한 기반의 하나인 그리스도교적 전통이 오리엔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서양문화의 더 근원적인 전통은 역시 그리스에 그 기원을 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오리엔트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생각 자체가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전제군주제하에 얽매어 있던 오리엔트인들과는 달리 그들이 자유스러운 시민으로 구성된 공동체국가, 즉 폴리스를 형성하고 유지했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폴리스를 만들어 냄으로써 고대 그리스인들은 서양세계가 장차 가지게 되는 국가형태의 원형을 마련했다고 서양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폴리스의 성립이라는 사실 이야말로 서양사와 오리엔트 역사, 더 나아가서는 서양역사와 동양역사가 갈라서는 분기점이라 생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폴리스의 기원과 성립
그러나 막상 그러한 폴리스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기원전 800년경에 이르면 에게해 주변 각지에 많은 소국가들이 분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소국가 들은 대개 산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방벽에 의해 서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그 주민들은 흔히 언덕 위에 구축된 성채를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미케네 시대의 왕국들보다는 도리아인들의 침입 때 분열된 지방공동체, 즉 촌락보다는 컸는데, 이러한 소국가들이 곧 폴리스입니다.
폴리스가 가장 먼저 성립된 곳은 아마도 도리아인들에게 밀려난 원주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간 소아시아 서부해안, 즉 이오니아(Ionia)와 에올리아(Eolia)등지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들 그리스 이주민들은 소아시아 원주민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쉬운 반도나 그 밖의 적당한 곳에 그들의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했습니다. 이민족에게 둘러싸인 새로운 거주지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한데 뭉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조그마한 새 거주지에 알맞은 기존의 정치제도나 관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내야만 했으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곧 폴리스였던 것입니다.
그리스 본토에서도 사정은 대체로 이와 비슷했습니다. 다행히 도리아인들의 침략을 모면한 원주 그리스인들 또한 일단 유사시에 적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인접 마을에 살고 있는 몇몇 부족들이 한 요새나 한 시장 지를 중심으로 뭉쳐 살아야만 했습니다. 영웅 테세우스(Theseus)가 여러 마을을 한데 뭉쳐 아테네를 세웠다는 전승은 아마도 이러한 집주(集住, synoikismos)를 전한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정복민인 도리아인들도 원주민들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지점에 집주한 정복민 부족들이 군사공동체로서의 결속을 강화하는 통합된 정치체제를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라코니아 (Laconia)에 자리 잡은 스파르타(Sparta)가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이렇듯 폴리스는 대체로 그 성원들이 스스로를 지키려는 군사적 목적에서 결속한 하나의 전사공동체로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폴리스의 성원은 그것을 구성한 부족(phyle)의 구성원으로서, 처음에는 추첨으로 배정된 클레로스(kleros) 소유농민에서 유래한 독립적인 토지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생활 기반이었던 그리스의 농업은 포도 · 올리브 재배를 위주로 한 집약농업이었습니다. 그들은 대규모 관개농업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각종 부역이나 공납의 의무를 부담하지 않았으며, 강력한 전제군주의 통제와 지배하에 예속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독립된 자유민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유력한 자들이 바로 귀족들이었는데, 이들은 청동제의 투구와 갑옷, 방패와 철제 창검, 거기에다 군마(軍馬)까지도 자비로 갖출 수 있었던 소위 기마의 중장보병(hoplites)으로서 폴리스를 형성하고 이를 방위하는 데 주도적을 담당한 전사들이었습니다.
성립 초기의 폴리스가 대체로 왕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귀족정과 다름없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초기 폴리스의 왕은 오리엔트의 전제군주와는 판이한 존재였습니다. 왕은 전쟁에서 전사들을 지휘하고 종교의식을 주재하는 등 폴리스의 중요 사항을 관장했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전사들, 특히 전사귀족들의 모임에서 그들과 협의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습니다. 이리하여 전사귀족들의 발언권은 처음부터 강력할 수밖에 없었고 왕권은 이들 귀족들에 의해서 크게 제약받게 되어 정치의 실권은 사실상 이들 귀족층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그 후 기원전 7세기까지는 그나마 왕정의 형태마저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왕가는 귀족층에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폴리스 체제의 확산
에게해 주변 일대에 성립된 이런 폴리스의 체제는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그리스인들의 일대 식민운동에 의해 지중해 각지에 확산되었습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생계가 어려워진 일부 주민들은 새로운 천지에 모국과 비슷한 나라들을 세워 갔습니다. 이런 식민도시들은 흑해 연안, 아프리카해안, 시칠리아섬과 남부이탈리아 해안, 그리고 멀리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해안에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들 식민도시와 모도시 사이에는 종교적 · 경제적 · 문화적 유대관계는 긴밀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동등한 관계여서 식민도시는 완전히 독립된 국가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식민활동은 지중해세계의 교역을 촉진했습니다. 그것은 새로 건설된 식민도시들이 주변의 이민족들과 그리스 모도시 사이의 교역중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와 올리브유는 이민족들이 바라는 귀중한 상품이었으며, 그 대신 그리스인들은 이들에게서 곡물, 목재 등 원료를 사들였습니다. 이런 교역형태는 이후의 그리스 역사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포도와 올리브를 생산하는 농민들을 도시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이 잉여농산물의 대부분을 공납이나 세금 형태로 도시에 바쳐야 했던 오리엔트 사회와는 달리 그리스에서는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가진 농민들이 자유로운 판매자 혹은 구매자로서 도시의 시장을 드나들었으며, 농사의 여가에는 공공사를 담당하여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다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시민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한편 기원전 7세기 중엽 소아시아의 리디아(Lydia) 왕국에서 처음 사용된 화폐제도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에서도 채택됨에 따라 지중해 세계의 교역은 더욱 활발해지고 이것은 다시 수공업생산을 자극했습니다. 이래서 폴리스 안에서는 부유한 농민층과 더불어 부유한 상공업자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폴리스의 역사적 의미
같은 무렵에 일어난 군사상의 변화가 또한 이런 부유한 상공업자나 농민들에게 폴리스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습니다. 그것은 팔랑크스(phalanx)의 도입이었습니다. 팔랑크스란 중장보병으로 구성된 방진밀집대를 말합니다. 가로세로 8열 내지 10열로 사각형 밀집 대형을 이룬 보병들은 방패로 무장된 인간탱크와도 같았는데요. 이런 팔랑크스의 공격 앞에서는 종전의 기병이나 궁병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폴리스들은 팔랑크스를 주축으로 하는 군대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귀족 외에도 필요한 무장을 스스로 갖출 수 있는 상공업자들이나 부유한 농민들에게도 군대복무를 요청했습니다. 이리하여 폴리스의 정치에서 이들의 발언권과 책임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팔랑크스의 병사들에게는 개인적 용맹이나 힘보다는 차라리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진퇴 할 수 있는 긴밀한 협동정신과 공고한 단결력이 더욱 간절히 요구되었습니다. 각자의 안전은 이웃 병사가 전열에서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었는데요. 왜냐하면 각 병사의 방패는 자기의 좌반신과 함께 이웃 병사의 우반신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무용보다는 오히려 북소리에 발맞추어 진퇴 하면서 끝까지 자기 위치를 고수할 수 있는 인내심과 책임감이 더욱 중시되었습니다. 뛰어난 영웅의 개별적 능력보다는 무명의 평범한 병사들의 집단적 단결이 더욱 큰 역할을 했으며. 이로써 호메로스가 노래한 영웅들(귀족들)의 시대 대신에 스스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생명과 자유를 지킬 줄 아는 평범한 시민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팔랑크스의 병사로서의 오랜 집단훈련, 고난과 위험으로 가득 찬 실제 전투,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얻은 승리의 기쁨들을 나누어 가진 그리스 전사들은 전우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대감이야말로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폴리스에 대한 공통적인 자랑의 바탕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폴리스의 평범한 구성원이었으며 폴리스에 대한 봉사 속에 각자의 자기완성을 추구했습니다. 폴리스는 남과 보조를 맞추고 엄격한 집단규율을 따르는 가운데 개인적 자유의 실현을 인식한 시민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하게 된 기반이 되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대한 봉사라는 서로 엇갈리듯 보이는 두 개의 원리는 이렇게 하나로 결합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고대 그리스 역사 속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확산 과정, 그리고 폴리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폴리스의 성원으로서의 생활이 중요했던 그리스의 역사를 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더 흥미로운 세계사 주제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